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인물 (문단 편집) === 수용소의 간수 === * '''[[프란츠 치라이스]]'''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장 * '''[[아돌프 추터]]''' [[프란츠 치라이스]]의 부관 * [[https://en.m.wikipedia.org/wiki/August_Bogusch|아우구스트 보구슈]] * [[https://s-media-cache-ak0.pinimg.com/736x/8c/2a/4f/8c2a4ffc48dca3f743624caf2f2dfe33.jpg?width=400|그레타 뵈젤(Greta Bösel)(7번 오른쪽의 여자)]] (1908년 5월 9일 - 1947년 5월 3일) 직업이 간호사였던 뵈젤은 1939년에서부터 유대인 선별 작업의 관리자로서 라펜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 수용소에서 근무했다. 뵈젤은 어떤 수감자가 즉시 가스실로 보내질 것이며 어떤 수감자가 포로 수용소로 보내질지를 결정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광적인 나치주의자였으며 그녀는 온갖 학대와 고문 그리고 폭력을 일삼았고 그러다가 환자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만약 그들이 일을 할 수 없다면, 썩어서 죽어버리게 내버려 둬"'''라고 수감자들에게 말했던 것으로 생존자들이 증언했다. 소련군이 라펜스브뤼크 수용소로 밀고 들어오자 그녀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 탈출했으나 나중에 영국군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함부르크 라펜스브뤼크 전범 재판에서 학대 행위, 살인, 그리고 유대인 선별 과정에 참가한 것으로 인정되어 정확하게 1947년 5월 3일 오전 9시 55분에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 [[http://i1.wp.com/weheartvintage.co/wp-content/uploads/2014/06/591px-The_Liberation_of_Ber.jpg?resize=550%2C558.jpg?width=300|게르트루데 자워(Gertrude Sauer)]] * [[http://i2.wp.com/weheartvintage.co/wp-content/uploads/2014/06/592px-The_Liberation_of_Ber.jpg?resize=550%2C557.jpg?width=300|게르트루데 파이스트(Gertrude Feist)]] * '''[[루돌프 회스]]'''(Rudolf Höss) (1901년 11월 25일 - 1947년 4월 16일) [[http://www.carnialibera1944.it/immagini/auschwitz/hoess.jpg?width=250|다른 사진]] 나치 간수들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간수들 중에서도 최악의 학살자.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책임자'''이며 수백만이 죽은 인종청소의 가장 큰 주범이다. 의도적인 살해가 아니라 병과 기아 등 어쩔 수 없는 죽음이 대부분이었다고 되도 않는 변명을 하기도 한 진정한 쌍놈. 나치 독일에서 아우슈비츠 소장으로 복무할 때 그곳에서 벌어지는 강제 노동, 생체실험, 수용자 학대 등의 각종 잔혹 행각을 주도했으며 이러한 행각의 결과로 무려 '''1백만 이상'''의 사람을 죽게 한 악마 중의 악마다. 전후 가명을 써서 탈출했으나 영국군이 아내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아이 중 하나를 [[소련]]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을 해 농장의 인부로 숨어있던 그를 찾아냈다. 당시 회스의 악행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이자를 잡자마자 동행한 군의관이 "살려서 재판에 넘겨야 된다."라고 일갈할 때까지 두들겨패댔다고 한다. 연합군은 그의 죄악을 응징하는 의미에서 일부러 아우슈비츠 근처까지 끌고 가서 교수형에 처했는데, 나치의 핵심 전범들조차 그런 대우는 받지 않은 점에서 얼마나 죄가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으며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가족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개드립]]을 쳤다. 처형당할 때 아우슈비츠 소장 사무실, 즉 그의 이전 근무자가 보이는 곳으로 특별히 처형장을 만들고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에게 그의 처형을 관람하게 하는 등 갖은 모욕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처형당했다. 그의 처형지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아직까지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서찰은 자기가 저지른 짓이 인류에 대한 범죄임이 분명하며 사죄한다는 식의 데꿀멍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름이 [[루돌프 헤스]]랑 비슷한데, 헤스와는 관계 없으므로 주의할 것. * [[https://s-media-cache-ak0.pinimg.com/736x/52/b9/b0/52b9b0ebbd1c3aad473f3672b1038382.jpg|'''루트 클로지우스노이데크(Ruth Closius-Neudeck)''']] (1920년 7월 5일 - 1948년 7월 29일) 클로지우스 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폴란드의 블라우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결혼해서 루트 노이데크 또는 루트 클로지우스노이데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944년 7월부터 라펜스브뤼크(Ravensbrück) 수용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그녀는 잔인성이 대단해서 라펜스브뤼크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상부의 눈에 들어 승진을 거듭했다. 이 자는 나치의 여성 범죄자들 중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잔인한 자였는데 약 5천 명에 달하는 여자와 아이들을 거의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했다. 가스실에 들어갈 여자 포로들을 직접 골랐으며 포로들의 목구멍에 날카로운 삽을 집어넣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또한 그녀의 감독 하에 있던 사람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죽기 일쑤였다. 결국 나치가 패망한 후 체포되어 하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 [[http://historianet.nl/files/bonnier-his/imagecache/630x420/pictures/Mariamandel.jpg?width=350|'''마리아 만델(Maria Mandel)''']] (1912년 1월 10일 - 1948년 1월 24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우슈비츠]] 생체실험의 공식적인 지휘자 중 하나가 되었고 나치의 여성간부들중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은 간부로서 50만명의 여성 포로를 죽이는데 직접적으로 가담한 걸로 알려지고 있으며,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가 직접 수용소 문 앞에서 포로들이 나오는걸 지켜보면서 죽일 포로들을 골랐다고 하며 그 때문에 그녀가 문앞에 서 있는 날에는 포로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대인들을 자신의 애완동물로 부려먹기 위해서 선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선별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지겹다고 느껴졌을 때, 그녀는 '''그 "애완동물"들을 가스실로 보내버렸다.''' 또한 유대인 이송, 유대인 선별, 유대인 처형 그리고 점호를 하는 동안에 공연을 하게 했던 아우슈비츠 여성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나치가 패망한 후 그녀는 도망가다가 체포되었고 전범 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1946년 1월 24일 교수형을 당했다. * [[https://s-media-cache-ak0.pinimg.com/736x/67/45/c4/6745c48db0499ea5494d8573cc775f27.jpg|'''반다 클라프(Wanda Klaff)''']] (1922년 3월 6일 - 1946년 7월 4일) 1922년 단치히에서 태어났고 1938년에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1942년 결혼할 때까지 잼 공장에서 일하다가 라펜스브뤼크 수용소에 합류했는데 대부분의 간수들은 1941년에 참가한 반면 클라프는 뒤늦게 나치에 합류해서 지각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클라프는 스투트호프 강제 수용소로 1944년에 배치되었고 그녀는 1945년 종전 직전까지 그 곳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고 탈출하다가 폴란드 경찰에 1946뎐 체포되었고 1946년에 그녀는 재판을 받고 그녀가 저지른 범죄행위가 인정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클라프의 악행은 전범 재판에서 그녀가 말했던 단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난 매일 최소 두 명의 수감자들을 구타했어요. 난 정말로 유능하고 강제 수용소에서 내가 맡은 일에 헌신적이었어요."''' * [[http://www.rowdiva.com/vera1.jpg|'''베라 잘베크바르트(Vera Salvequart)''']] (1919년 11월 26일 - 1947년 6월 26일) 라펜스브뤼크 캠프의 간호사. 191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독일로 이사했고 1941년부터 라펜스브뤼크 수용소에 근무하면서 나치 생체실험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대부분의 포로들이 가스실에서 죽었지만 그렇지 않은 포로들은 직접 독을 주입해서 죽였는데 '''약 1000명이 넘는 여자들을''' 가스실에서 죽였다고 한다. 그녀는 나중에 사망 진단서를 작성하여 시체에서 금니를 빼내는 일을 하기도 했다. 결국 전범 재판에서 죄가 인정되어 1947년 6월 26일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 '''[[빌리 멘츠]]''' * [[https://cdn.newsapi.com.au/image/v1/e85aa36211d35ca9966263ae64104a77|'''야키프 팔리(Jakiw Palij)''']](1923년 8월 16일 - 2019년 1월 11일) 2018년 9월까지 자신의 신분과 나치 독일에 협력한 사실을 숨기고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다 추방 당한 인물이다. 1949년 미국으로 이민 올 당시 야키프는 이민 심사에서 농장과 공장에서 일해왔다고 속여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게슈타포]] 훈련을 받았고 1943년에는 [[트라브니키 수용소]]에서 무장 경비로 근무한 사실이 있고, 유대인 학살 작전인 [[라인하르트 작전]]에 가담한 혐의가 있으며 [[슈츠슈타펠|SS]] 훈련 또한 이수한 혐의가 있다. 사실 야키프는 2001년 당시 미 법무부 조사에서 나치에 가담한 사실이 발각되어 2004년에 연방 법원이 추방 명령을 내렸지만 독일, 폴란드에서 수용을 거절한 것과 인권유린 등의 문제 때문에 어영부영 말년을 보내는가 싶었지만 [[미국 정부]]가 독일과 계속 담판을 지은 결과 추방을 집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때 미국인들이 야키프 팔리를 쫓아내면서 한 말은 >'''You're Neighborhood is Nazi!''' >'''당신의 이웃은 나치다!''' 한 평생을 평범한 사람인 척하며 살아온 그는 2019년 1월 9일 독일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 '''[[이르마 그레제]]''' [[아우슈비츠]]와 같은 강제 수용소에서 간수로 근무했으며 잔혹하고 변태적인 성격으로 승진을 거듭하여 3만명 이상의 수감자를 관리했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였는데 그들을 권총과 채찍, 그리고 자신이 기르던 개를 이용하여 포로들을 죽였다. 수용소안의 유력한 장교들과 스캔들을 내면서 장교들까지 자기 손아귀에 넣었는데 염문이 난 인물 중에서 [[요제프 멩겔레]]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치가 패망하고 그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 '''[[일제 코흐]]''' '''부헨발트의 붉은 마녀''' 혹은 '''부헨발트의 암캐'''라고 불리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부헨발트 수용소의 악명높은 간수이자 수용소장 [[카를 오토 코흐]] [[슈츠슈타펠|SS]][[대령]]의 부인이다. 포로들 중에 문신한 사람들의 피부를 벗겨내고 피부를 이용해 전등갓, 손가방, 사진첩 등을 만들었다. 인간의 엄지손가락 뼈로 만든 전등스위치도 발견되었지만 물론 이것들은 과장된 면이 있다. 그 유명한 연쇄살인마 [[에드워드 게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코흐이다. 말년에는 결국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복역 중 자살하였다. * [[http://i0.wp.com/weheartvintage.co/wp-content/uploads/2014/06/559px-The_Liberation_of_Ber.jpg?resize=550%2C589.jpg?width=300|'''엘리자베트 폴켄라트(Elizabeth Volkenrath)''']](1919년 9월 5일- 1945년 12월 13일) 라펜스브뤼크와 아우슈비츠에서 일하다가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수석 간수로 영전했다. 다른 자들 못지 않게 잔인하여 포로 처형에 가담하였고 전후 처형되었다. * '''[[요제프 크라머]](Josef Kramer)''' (1906년 11월 10일 - 1945년 12월 13일) '''[[루돌프 회스]] 그리고 [[오스카 디를레방어]]와 쌍벽을 이루는 자.''' 뮌헨 출신으로 1940년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루돌프 회스 소장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5월부터 1944년 12월까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관리자로 일했으며 1944년 12월부터는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안네 프랑크가 있던 수용소의 수용소장이 된 것이다.''' 그는 포로식량비를 착복했으며 수용능력의 8배가 넘는 8만8천여 명을 쑤셔넣은 결과 티푸스가 창궐, 매일 250~300명씩 죽어나갔다. 그러나 처리를 못 해 쥐가 시체를 먹고 산 사람까지 공격했다. 전후 베르겐-벨젠에서 해방된 수용자들은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나갈 방법은 이 굴뚝 외엔 없다'''라고 소각로를 가리킨 말은 매우 유명하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3만7천여 명에 달했다. 안네의 일기로 잘 알려진 안네 프랑크도 그 희생자 중의 하나다. 당연히 영국군에게 잡힌 후 열나게 두들겨 맞고 인사불성이 되어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5/Juana_Bormann.jpg|'''유아나 보어만(Juana Bormann)''']] (1893년 9월 10일 - 1945년 12월 13일) '''비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거나 '''개를 데리고 있는 여자'''라고 불리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여자이다. 1939년에 보어만은 나치의 보조단체에 가입했다. 그 이후 그녀는 종전직전까지 독일에서 가장 악명높은 강제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 라펜스브뤼크, 베르겐-벨젠을 거쳤다 그녀는 또한 잔혹한 행위로 유명했는데, 그녀가 수감자들을 구타할 때 동행했던 독일 [[셰퍼드]] 견종을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잘 유명했고, '''"개를 데리고 있는 여자"'''라는 별명은 여기서 온 것이다. 포로들 사이에서 그녀는 악마로 통했으며 포로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걸 즐겨보는 취미로 유명했다. 보어만 앞에서는 '''절대로 포로들을 한번에 죽여서는 안되었고 고문하면서 죽여야 했으며''' 그녀가 기르는 독일산 셰퍼드로 포로들을 '''잡아먹게 해서 죽이거나 개한테 물어뜯겨서 사망하게 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자자했다.''' 훗날 나치가 패망하고 요제프 크라머, 이르마 그레제와 함께 체포 된 후 전범 재판에서 그녀가 했던 말에 따르면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이런 짓을 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의 잔혹한 행동과 새디즘적인 행동은 살인혐의로 인정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1945년 12월 13일 처형되었다. * [[http://www.rowdiva.com/Auschwitz_woman_at_trial.jpg|'''예니 반다 바르크만(Jenny Wanda Barkmann)''']] (1922년 ?월 ?일 – 1946년 7월 4일) '''아름다운 유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나치에서의 포로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주로 여자들과 아이들을 맡았으며 포로들을 짐승 취급하기로 유명했던 인물로, 특히 애까지도 무자비하게 대했다고 한다. '''지 마음에 안 들면 가스실로 직행시켰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그녀를 엄청나게 두려워 했다고 한다. 결국 나치가 패망하고 체포되어 전범 재판에서 죄가 인정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그녀는 유죄판결을 받자 "보통 인생에서 기쁨과 즐거움은 정말로 짧은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결국 1946년 7월 4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4/42/Biskupia_Gorka_executions_-_17_-_Barkmann.jpg/220px-Biskupia_Gorka_executions_-_17_-_Barkmann.jpg|처형 후 그녀의 사진이다.]] * [[쿠르트 프란츠]] (1914년 1월 17일 - 1998년 7월 4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난 쿠르트 프란츠는 1929년부터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다가 1935년에 독일 국방군 육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937년에 친위대로 이적한 후 토텐코프 사단에 배치되어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간수로 일했다. 1939년부터 그는 [[T-4 프로그램]]에 동원되어 1942년 4월에 베우제츠 강제 수용소로 배속되었다. 1942년 8월에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로 이동한 쿠르트 프란츠는 프란츠 슈탕글 소장 아래에서 부소장으로 일했다. 1943년 6월에 친위대 소위로 승진한 후 1943년 8월부터는 트레블링카가 폐쇄되는 11월까지 소장으로 일했는데 쿠르트는 수용소 내에서 [[사디즘]]적 기질을 발휘하여 유대인들에게 잔학행위를 하며 그것을 즐겼다. 전후 미군의 포로가 된 쿠르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주하여 다시 요리사로 일했지만 1959년에 서독의 사법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 내의 잔학행위로 재판을 받았다. 1965년에 그는 법정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지만 1993년에 건강악화를 이유로 석방되어 1998년에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 '''[[https://en.m.wikipedia.org/wiki/Christian_Wirth|크리스티안 비르트]]''' 여기 있는 간수들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독일인에게도 구타를 서슴지 않았으며 여기에 수천명의 사람이 죽는 모습을 대놓고 즐길 정도였던 인물로, 여타 간수들도 그를 역겹다고 여겼다. 라인하르트 작전이 벌어진 기간 중 5개월 동안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소장으로, 그 이후에는 작전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수용소를 작업장처럼 속이거나 가스실을 샤워장으로 위장하는 방법을 도입하여 절멸수용소들의 학살 시퀸스를 완성하였다. 작전 종료 이후에는 여타 라인하르트 작전 관련자들과 함께 북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토벌 임무에 투입되었다가 파르티잔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 '''[[프란츠 슈탕글]] (Franz Paul Stangl) (1908년 3월 26일 - 1971년 6월 28일)'''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소장이자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의 초대 소장이다.[* 1달 간의 비율로 따지면 트레블링카가 아우슈비츠보다 더 악랄했다.] 트레블링카의 초대 수용소장이었던 이름프리트 에베를의 후임자로, 엉망진창이던 수용소의 학살 시퀸스를 정비하여 학살이 훨씬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의 부임기간 동안 약 60만명이 트레블링카에서 살해되었다. 이전에도 소비보르에서 불과 4개월만에 10만을 살해했으며, 기타 집시, 장애인들까지 합치면 그가 살해한 인물은 100만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오스트리아의 알트뮌스터에서 태어난 슈탕글은 야간경비원인 아버지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아 1916년에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슈탕글은 아버지가 입었던 제복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고 나중에 이야기했다.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슈탕글은 1931년에 일을 그만두고 오스트리아 경찰에 들어갔다. 당시 위법단체였던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당원으로 2년간 재적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슈탕글은 1938년에 [[오스트리아 합병]]시 구 경찰요원들이 체포되자 이를 피하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던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당원이 되어 기금도 냈다고 후에 증언했다. 이에 슈탕글은 검거열풍에도 살아남아 오스트리아 경찰의 간부직을 유지했는데 1940년에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으로 그는 [[T-4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1942년에 폴란드로 건너 간 슈탕글은 1942년 3월부터 9월까지 소비블 강제 수용소의 소장으로 근무했다. 슈탕글은 유대인의 처리를 담당하여 10월에 기계가 고장으로 멈출 때까지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의 아내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에 대해 근심스럽게 이야기하자 슈탕글은 이것은 일일 뿐,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며 더 이상의 질문을 막았다고 한다. 1942년 9월에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소장으로 부임한 슈탕글은 술에 취한 채 유대인들을 화물로 부르기도 했는데 그는 술을 매우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으며, 술버릇이 나빠서 화물에서 취중에 유대인을 죽인 적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자 슈탕글은 신분을 감추고 숨었다. 그러던 중 미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탈옥하여 이탈리아로 달아났다. 당시 바티칸의 알로이스 후달 사교가 도주로를 만들어 슈탕글을 도망시켰다고 하여 바티칸과 나치의 공모혐의로 꽤 시끄러워지자, 슈탕글은 적십자사가 발행한 위조여권을 사용하여 시리아로 향했다. 후달 사교에 의한 나치 잔당의 도망제공은 1947년 신문에서 대서특필되었는데 그 후 후달은 1951년에 사직하여 1963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슈탕글은 1951년에 [[브라질]]로 향하기 전까지 약 3년간 아내와 가족과 함께 시리아에 머물렀다. 브라질로 도망한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상파울루의 폭스바겐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프란츠 슈탕글이란 본명을 떳떳하게 현지에서 사용했다. 그러나 슈탕글은 1961년에 나치의 학살혐의로 체포되어 서독정부의 법정에 기소되었다. 슈탕글은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자신은 맡은 일에 따랐을 뿐이라 주장했지만, 결국 법정은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1971년 6월 28일에 수감 중이던 뒤셀도르프 형무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http://i1.wp.com/weheartvintage.co/wp-content/uploads/2014/06/587px-The_Liberation_of_Ber.jpg?resize=550%2C562.jpg?width=300|프리다 발터(Frieda Walter)]] * [[쿠르트 볼렌더]] (1913년 5월 21일 - 1966년 10월 10일) 독일 뒤스부르크 출신인 볼렌더는 1939년에 나치당에 입당해 나치 친위대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T-4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했고. 그는 동료인 프란츠 슈탄겔 및 카를 프렌젤과 함께 1942년 4월에 막 완성된 소비블 강제 수용소의 간수로 부임했다. 소비블에서 볼렌더는 수인들의 작업 감독관으로 일했는데 파울 그로드 친위대 장교와 함께 개를 데리고 다니면서 동향을 감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식 죄수들에게 '''"어라? 넌 일할 마음이 없나보군?"'''이라면서 개를 풀어 물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도착하면 가스실로 보낼 자와 일할 자를 구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그러나 소비블 근무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1942년 7월에 거짓 이혼의 증거를 제출한 혐의로 체포되어 12월에 친위대 법정에 세워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1943년 10월에 소비블에서 죄수들의 대탈주가 벌어지면서 소비블이 폐쇄되자 볼렌더는 출소 후 소비블의 해체작업에 파견되었고 그렇게 근무는 끝났다. 전후에는 볼렌더는 아내에게 자신이 죽었다고 증언하게 하여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 볼렌더는 하인츠 브룬너라는 가명으로 홀트하임에서 숨어 살았는데 1961년 5월에 서독의 사법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대량학살에 관여한 죄로 기소되었지만 하겐에서 재판이 이루어지던 도중인 1966년 10월 10일에 구치소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 [[http://i1.wp.com/weheartvintage.co/wp-content/uploads/2014/06/585px-The_Liberation_of_Ber.jpg?resize=550%2C564.jpg?width=300|힐데 리지비츠(Hilde Lisiewitz)]] * [[http://i2.wp.com/weheartvintage.co/wp-content/uploads/2014/06/588px-The_Liberation_of_Ber.jpg?resize=550%2C560.jpg?width=300|힐데가르트 로바워(Hildegard Lohbauer)]] * [[http://i2.wp.com/weheartvintage.co/wp-content/uploads/2014/06/585px-The_Liberation_of_Ber1.jpg?resize=550%2C563.jpg?width=300|헤르타 보테(Herta Bothe)]] (1921년 1월 8일 - 2000년 3월 16일) 보테 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도와 작은 나무 가게에서 일하다가 병원에서 간호사로 한 후, 공장에서 잠깐 일했다. 그러다가 1942년에 징병된 후 보테는 단치히 근처의 스투트호프 수용소에서 복무했다. 그녀는 잔혹한 감독관으로 재판에서 이야기 되었고, 보테는 소련군이 스투트호프 수용소로 밀려들어오자 탈출에 성공했으나 목재보관소를 관리감독했던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전범 재판에서 새디스트적인 성격과 무자비한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되었으나, 그녀가 저지른 범죄행위는 그녀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범죄 수준만큼 악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물론 무자비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교수형에 처해지는 대신에 감옥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영국 정부로부터 매우 관대한 처분을 받기도 전에 풀려나서 감옥에서 고작 6년만 복역했다. 2004년에는 종전 후 60년이 지나서 했던 인터뷰 도중에 그녀는 강제 수용소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 기자가 자신이 했던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요? 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그것이 강제 수용소였다는 것이 잘못이었죠. 하지만 난 그곳에 가야만 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내 스스로가 그곳에 집어넣어졌을 테니까요. 그게 내가 저지른 잘못이었어요."''' * [[http://i0.wp.com/weheartvintage.co/wp-content/uploads/2014/06/593px-The_Liberation_of_Ber.jpg?resize=550%2C556.jpg?width=300|헤르타 엘레르트(Herta Ehlert)]] * [[http://i0.wp.com/weheartvintage.co/wp-content/uploads/2014/06/591px-The_Liberation_of_Bergen-belsen_Concentration_Camp_1945-_Portraits_of_Belsen_Guards_at_Celle_Awaiting_Trial_August_1945_BU9707.jpg?resize=550%2C557.jpg?width=300|헬렌 코퍼(Helene Kopper)]] * [[https://en.m.wikipedia.org/wiki/Gustav_Wagner|구스타프 바그너]](Gustav Wagner) * [[요제프 쉬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